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
三月
비워 둔 화분에 고인 빗물이 자꾸 없어지겠구나
죽거나 살거나 하는 시간의 기록지 위에
또 한 사람을 눕히는구나
그대가 까마귀떼 맴도는 바람의 중심에
그 사람 입다 간 옷가지들을 걸었구나
오지 않은 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는 사람을
배웅하는 그대 모습이
저물 무렵 바지랑대에서 빛나는 속옷보다 더 희구나
四月
밤새 별과 그 사이의 어둠과
집을 찾지 못하는 것들이
뒤척이는 소리를 듣느라
너의 마음에 결석을 했네
헤진 角을 꿰매지 못하는 달 그림자와
번호를 지우며 잠을 청하는
나무들과 얘기를 하느라
한 무리의 짐승들이 떠나는 밤길에 동행하지 못했네
七月
가을엔 떠날 것이네
세상의 옷 벗은 나무들을 사진 찍어 주러
짐도 싸지 않고 그렇게 떠날 것이네
취기를 빌리지 않고 돈도 갚지 않고 갈 것이네
가을과 풍경 사이를 한눈 팔지 않고 직행할 것이네
바람 다음에 오는 신호가
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네
八月
여름 내내 나를 데웠던 윗집 현악기 소리
내 살에 와 닿는 울림을 쳐내느라
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네
더운 바람마저 혈관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날엔
누구나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했네
몸을 빠져 나오는 찌꺼기들과
쥐도 새도 모르게 갉아 먹히는 마음들,
그 더미 속으로 목쉬도록 빨려 들어가지 못했네
여름엔 지우는 일이 많았네
무엇보다 미워하는 일이
허무는 일이 많았네
十一月
마음의 등걸에 첫 눈이 쌓이네
바람 부는 날이 되어서야
기차 소리를 겨우 듣고
짤막한 확성기 소리에 밖이 궁금했네
누구도 만난 적이 없는 십일월,
누구라도 열쇠로 문을 따고
어둑신한 내 몸 뒤로 난 길
그 한가운데로 내몰아줬으면 했네
- 이병률, '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'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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