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◆ 힐링이 되는 글/좋은글

[좋은글] 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

by 목달이버선 2018. 6. 24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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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


어두운



三月 

비워 둔 화분에 고인 빗물이 자꾸 없어지겠구나 

죽거나 살거나 하는 시간의 기록지 위에 

또 한 사람을 눕히는구나 

그대가 까마귀떼 맴도는 바람의 중심에 

그 사람 입다 간 옷가지들을 걸었구나 

오지 않은 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는 사람을 

배웅하는 그대 모습이 

저물 무렵 바지랑대에서 빛나는 속옷보다 더 희구나

 

四月 

밤새 별과 그 사이의 어둠과 

집을 찾지 못하는 것들이 

뒤척이는 소리를 듣느라 

너의 마음에 결석을 했네 

헤진 角을 꿰매지 못하는 달 그림자와 

번호를 지우며 잠을 청하는 

나무들과 얘기를 하느라 

한 무리의 짐승들이 떠나는 밤길에 동행하지 못했네 


七月 

가을엔 떠날 것이네 

세상의 옷 벗은 나무들을 사진 찍어 주러 

짐도 싸지 않고 그렇게 떠날 것이네 

취기를 빌리지 않고 돈도 갚지 않고 갈 것이네 

가을과 풍경 사이를 한눈 팔지 않고 직행할 것이네 

바람 다음에 오는 신호가 

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네

 

八月 

여름 내내 나를 데웠던 윗집 현악기 소리 

내 살에 와 닿는 울림을 쳐내느라 

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네 

더운 바람마저 혈관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날엔 

누구나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했네 

몸을 빠져 나오는 찌꺼기들과 

쥐도 새도 모르게 갉아 먹히는 마음들, 

그 더미 속으로 목쉬도록 빨려 들어가지 못했네 

여름엔 지우는 일이 많았네 

무엇보다 미워하는 일이 

허무는 일이 많았네 


十一月 

마음의 등걸에 첫 눈이 쌓이네 

바람 부는 날이 되어서야 

기차 소리를 겨우 듣고 

짤막한 확성기 소리에 밖이 궁금했네 

누구도 만난 적이 없는 십일월, 

누구라도 열쇠로 문을 따고 

어둑신한 내 몸 뒤로 난 길 

그 한가운데로 내몰아줬으면 했네


- 이병률, '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'

 

 

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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